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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에 대해서 -재미있는 범선 이야기
1.미국의 상징 메이풀라워호(May flower)호
미국의 정신을 이야기 할때 대부분 영국에서 이민자들을 태워온 메이 플라워란 배를 이야기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들 청교도들이 종교의 박해를 피해서 아메리카 대륙에 와서 미국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메이 플라워 이전에도 미국에는 이민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미국의 정신을 이야기 할때 메이 플라워를 이야기를 할까요? 그래서 메이 플라워호에 대해서 설명 해 보겠습니다. 우선 먼저 메이 플라워를 타고 온 청교도들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청교도는 1560년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의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 성서의 자유'를 외치던 종교개혁의 미진함에 대하여 항거하면서 일단의 교회의 개혁을 주장 하던 칼빈주의들을 청교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들은 신앙과 예배 의식 그리고 모든 교회의 체제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개혁을 주장하다가 영국 국교회로부터 혹심한 박해를 받게 되자 1620년 8월 15일 청교도들은 그당시 노르웨이 깊숙한 발틱해까지 순항하며 선원, 목재, 생선과 약간의 그린랜드산 고래고기등을 운송하는 Mayflower호를 Thomas Weston란 사람이 John Carver와 Robert Cushman 의 지원을 받아 버지니아(처녀지라는 뜻 : 1607년 영국인 105명이 세척의 배를 타고 아메리카 북위 36도 해안지방에 상륙하여 식민을 하기 시작한 최초의 지역)북쪽의 식민지 건설을 목적으로 항해에 착수키 위해 Speedwell호와 함께 용선을 하여 일단의 청교도들을 태우고 Southampton (영국남부 해안의 항구 도시)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납니다. 그러나 Speedwell는 삼백 마일을 항해한 후 선체의 누수(물이 새는) 결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서 결국 Mayflower호의 Christopher Jones선장을 비롯하여 무려 102명의 사람들만 항해를 계속하였습니다. 튼튼한 목재를 사용하여 만든 배였지만 많은 사람을 싣고 항해하기에는 부담이 되어고 약 2노트의 속력으로 대서양 3000마일을 67일 동안 항해를 하였으나 그 당시의 원시적인 항해술로 목표지점에 도착할 수가 없어 Jones는 조금은 멀리 떨어진 Cape Cod의 해변에 일단 하선을 하여 그 곳에 머물도록 결정을 하면서 수 주일동안 해변을 탐험한 후 그 지역 이름을 그들이 떠나온 폴리머스항 이름을 따서 "폴리머스 (Plymouth)", 그곳에 있는 강 이름은 선장의 이름을 따서 "죤스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영국의 북미 본토 두 번째이며 뉴잉글랜드 최초의 식민지인 "폴리머스 (Plymouth)"가 탄생이 되었습니다. 혹독한 겨울과 추위와 굶주림, 괴혈병으로 거의 절반이 죽는 고통을 당해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50명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인디언들이 그들을 찾아와 그 부족의 추장이던Massasoit의 지휘아래 당장 필요한 물건과 양식을 주고 비료를 만드는 법,곡식과 채소를 그 토양에서 재배하는 법, 사냥하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고합니다. 그 덕분에 그 해 가을의 첫 수확은 놀랄만큼 풍요로왔고 그들이 첫 수확 앞에서 벅찬 감동을 느꼈고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11월의 네 번째 목요일을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축제를 열었습니다. 이 첫 Thanksgiving Day는 원주민들이 자리를 함께 한 가운데 사흘간에나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숲에 많이 야생하던 칠면조(turkey)를 잡아오고 여자들은 호박파이를 만들고 옥수수, 과일 등으로 푸짐한 음식을 차렸습니다. 넓디 넓은 신대륙의 한 귀퉁이에서 치러진 감사의 이 첫 Thanksgiving Day가 오늘까지 이어져서 자유와 모험을 사랑하는 미국인들의 큰 명절로 자리잡을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 이주자들은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메이플라워의 맹약 (Mayflower Compact)으로 그들끼리 굳은 신앙심 과 용기를 가지고 뭉쳐 어느 식민지와는 다르게 높은 도덕의식을 가지고 자치적으로 모범되게 그 고장을 꾸려 나가 그들이 살던 뉴 잉글랜드는 지금도 미국 정신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되었습니다. 또 그들은 청교도의 유능한 목자와 일꾼들을 기르기 위하여 하버드 대학 (Harvard), 예일 대학(Yale) 등 명문 고등 교육기관을 세웠으며 미국 초기 역사와 문화 그리고 교회를 창조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 봄이 돌아오자 매이플라워호는 1621년 4월 영국으로 돌아 오기위해 출항을하여 스페인 , 아일랜드, 프랑스등 지중해의 포도주와 향신료 무역선으로 활약을 하다 죤스 선장이 죽자 약 2 년동안 항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당시 나무가 부족했던 영국에서는 이배를 분해 하여 작은 조각 으로 팔려지고 말았습니다. Mayflower호의 정확한 구조는 알려져 있지 않고 있고 이배에 대한 스케치, 그림,상세도가 없고 대략 180톤의 적재량을 가진 배로 알려져 있어 이 사실에 근거하여 17세기 상 구조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매이플라워호는 길이가 약 95피트이며그 당시 "fluyt"라는 상선을 본 따 만들어졌고 이 배보단 선미 부분이 약간 더높게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약 45도의 직선의 이물(Stem)을 가지고 길고 곧은 선체는 항해시 물의 영향을 덜받게 고안되었다고 합니다.

총 3개의 마스트를 가지고 위쪽과 아래쪽 spiritsail은 bowspirit에 장착이 되어 같은 사이즈의 배와 비교하여 더 적은 승무원으로 배를 조작할 수 있었으며 다른 전함들 같이 해적들의 방어를 위해 10개의 포를 가지고 었다고 합니다. 1928년 Mayflower호는 17세기 상선건조 전문가 R.C.Anderson에 의해 복원적이 있으며 1955년 영국 스튜어드 압팜스 조선소에서 설계와 고증을 담당한 William. A. Baker에 의해 비슷한 유형의 MayflowerⅡ로 복원 하여 1977년에는 17세기초 청교도들이 대서양을 건너던 조건으로 시험 항해를 하여 지금은 미국의 폴리머스항에서 관광객을 위해 영구 보존 중에 있습니다.
참고자료 -(메이플라워 서약)
신의 이름으로, 아멘,

그 이름들이 아래 씌어 있는 우리들, 신의 은총에 의하여 대영국과 프랑스와 아일랜드의 우리들의 경의로운 최고 통치자인 국왕이요 신앙의 옹호자인 제임스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신의영광과 크리스트교 신앙의 증진 그리고 우리들의 국왕 및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버지니아의 북부 지방에서 최초의 식민지를 건립하려고 항해를 시도하였던 바, 본 증서를 통하여 우리들의 보다 더 바람직한 질서 수립과 보존, 그리고 전술된 목적들의 촉진을 위하여 엄숙하게 상호간에 신과 서로의 면전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시민적 정치 단체로 결속한다. 그리하여 이에 바탕하여 식민지의 일반적 복지를 위하여 가장 적합하고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정의롭고 공평한 법률과 법령과 결정 그리고 관직을 수시로 제정하고 구성하고 조직하기로 한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최고 통치자 제임스 왕의 잉글랜드와 프랑스와 아일랜드에서의 치세 18년 그리고 스코틀랜드 에서의 치세 54년, 기원 1620년 11월 11 code cap에서 우리들의 이름들을 여기 서명하였다.
2.커티샥 범선에 대하여
커티샥(Cutty Sark)이란 말을 우리 주위에서는 양주의 이름으로 또는 요트 항해의 이름으로 자주 볼수 있는데 도대체 왜 커티샥이란 말이 유명 한것인지 한번 알아 보았습니다.
커티샥의 유래
스코틀랜드의 18세기 시인인 "Robert Burns"의 서사시인 "Jam O`jhanter"에서 나오는 말로 짧은 속치마를 입은 아름다운 미녀들이 말보다 빨리 달린다는 전설이라고 합니다.이 전설을 보면 Jam이란 농부가 폭풍이 심해지자 늦은 저녁까지 술을 마신후 그의 회색말을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참을 가다 Allaway 교회 뜰을 지나갈 무렵 그는 울부짖는 백파이프 소리를 듣고 호기심에 말을 몰고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까이 갔는데 그곳에는 몇 명의 추하고 늙은 마녀들이 춤추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그 자리를 떠나려 할 때 무덤 뒤에서 "짧은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젊고 아름다운 어린 마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어린 마녀의 춤이 더 요란해지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고합니다. "잘 한다! Cutty Sark"
그러자 갑자기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며 한 줄기 번개가 번쩍거렸고 이 소리에 춤을 추던 어린 마녀가 jam을 발견 하고서는 그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이레 놀란 Jam 은 그의 말을 힘껏 몰아 그 아름다운 마녀에게서 도망을 치기시작했습니다. 마녀가 말 보다 빨리 달려서 그를 거의 잡으려고 할때쯤 그가 마녀들이 흐르는 강물을 건널 수 없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근처의 다리를 향해 달렸다고 합니다. 다리에 도달해 강물을 건너려 할때 뒤쫒아 오던 마녀가 말의 꼬리를 잡아 꼬리가 뽑혔다고 합니다.
이 전설의 유래로 1869년 스코틀랜드에서는 새로운 범선이 만들어 졌을 때 그 배의 주인들이 배가 좀더 빠르다는 걸 표현 하기 위해 배의 이름을 "Cutty Sark"이라 붙이면서 배의 앞머리레 팔을 길게 뻗은 마녀의 동상을 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동안 항해를 마치고 나서 배의 견습생들은 오래된 밧줄에 회색을 칠해 마녀 동상의 손에 꽂아서 꼭 말의 꼬리를 잡아 땐 것 같이 만드는게유행이였다고 합니다.
cutty sark은 범선시대의 막을 내리는 시기에 만들어진 범선으로 1869년 이미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선박이 있었으나 희망봉(The Cape of Good Hope)을 기점으로 하는 항로에서는 영국이 석탄을 재 충전시킬 만한 충분한 아프리카식민지가 없었기에 Cutty Sark은 동력선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무역에 사용되었습니다.1869년 진수하여 인도 방면으로 모직물을 수출하고 돌아올 때 홍차와 향료 등을 실어 나르던 선박입니다. 원래 Cutty Sark은 1869년 Clyde강에서 차(tea) 수송선으로 건조되어 중국으로의 차수송에 사용되었고 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의 wool의 무역을 하던 최초의 무역 범선이었습니다. 19세기에 전 세계를 누비고 항해하며 그 위엄이 드높았던 수 많은 범선들중 유일하게 "Cutty Sark"호가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25년간 영국기업에 속해 있다가 포르투칼로 국적이 바뀐 후 1922년에 찬란했던 경력을 마감하면서 은퇴한 한 선장 Wilfred Downmand의 도움으로 다시 영국으로 돌아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1930년부터 1940년대에는 해군 연습용 상선으로 쓰여 졌다가 "Cutty Sark"호의 보존을 위해를 후원금 활동이 벌어졌고 Gneenwich의 Dry dack에 옮겨지게 되어으며 1975년에 영국여왕에 의해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해마다 수천명의 관광객을 불러 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커티샥 이란 양주에 대하여
1923년 런던 세인트 제임스 3번가에 위치한 베리 브러더스 & 러드사는 와인과 양주업에 유서깊은 기업으로 가문 전체의 사업인 양조업으로 1690년도에 3번째로 왕실의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합니다. 다른 위스키와의 차별을 위하여 "프랜시스 베리"사장은 가장 순수한 몰트위스키들을 선택하여 혼합해야 하며,그 위스키의 색깔은 자연적으로 light한 색을 가져야 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롭게 새롭게 탄생된 연한색의 고품질 스카치가 만들어졌으며이 위스키에 적합한 이름을 위한 논의를 하였는데 이논의에 참석한 인물중 당시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예술가인 제임스 멕베이가 자신이 한때 선원이였고 또 지금 유명한 범선인 "Cutty Sark'호가 수년동안의 포르투갈의 소유에서 벗어나 영국으로 돌아와 많은 화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새 위스키에 훌륭한 배의 이름인 "커티 샥"을 이름으로 붙이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또 라벨구상으로 어두운 크림 빛을 사용함으로써 그연령을 과시하려했지만 인쇄소의 실수로 밝은 노란색을 띄게 되었는데 오히려 격적인 시각효과로 계속 사용키로 결정되었으며 그것이 오늘날 유명한 밝은 노란색 라벨의 커티삭 스카치 위스키의라벨이라고 합니다.
커티 샥 범선 항해대회
세계 항해 훈련 협회(International Sail Training Association)주관으로 1956년 첫 항해를 시작한 커티삭 범선대회는 1972년 영국의 양조회사 배리 브라더스 앤 러드사가 소유한 커티삭 위스키의 공 식 협찬과 더불어 "Cutty-Sark Tallships' Races"라는 명칭으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규모 가 큰 국제적인 범선 항해대회 행사로 연령과 국적 을 초월한 국제적인 행사로서 항해기간동안 전세계 의 젊은이와 함께 선원으로써 참가, 공동항해를 통 해 국제적인 친목과 우정을 다지고 거센 파도와 싸 우면서 모험정신과 도전정신 함양과 더불어 범선의 웅장한 위용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을 목표로 하며 매년 7-8월 중에 열리는 세계적인 행사로 발틱 해, 북해,지중해 등 전세계의 바다에서 매년 항로를 바꿔가며 열리고 있으며 참가자의 자격기준은 엔진을 사용하지 않고 돛과 바람에 의지하는 7-10일간의 항해에 선원으로 참가하는 이 범선대회를 즐길 수 있는 신체건강하고 건전한 사고방식의 만 25세 이하의 남녀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우승 트로피는 국제적인 친선도모와 협동심 도모라는 기본 취지에 맞게 가장 빠른 속도로 항해를 마친 팀에게 우승 트로피를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항해기간동안 국제적인 친선도모와 우정에 가장 크게 기여한 범선과 그 범선의 선원들에게 공동 수여되면 대상자 선정은 대회 참가 범선의 선장 및 ISTA 관계자들의 공정한 투표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3.쾌속범선 Flying Cloud호
19세기 초엽, 영국과 미국간에는 영국 해군 수병에 대한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영국 해군 함정에서 도망쳐서 미국의 상선에 취업하는 수병들이 늘어 났다. 그래서 영국 해군은 이를 핑계 삼아 미국의 상선뿐만 아니라 군함까지도 검사를 하여 미국 선원을 영국 해군의 도망병이라고 잡아가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미국에서는 영국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어 분쟁이 생기게 되었고 미국에서는 영국이 나폴레옹 때문에 미국 연안까지 해군력을 뻗치지 못할거란 계산으로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였으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패하자 영국은 미국의 연안까지 막강한 해군력으로 봉쇄하여 들어갔다. 영국 함대와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려운 미국에서는 영국해군보다 더 빠른 쾌속선을 건조하여 영국 해군의 봉쇄망을 뚫고 나가 교역에 종사하거나 사략 활동하기 위하여 미국에서 개발 건조된 선박이 크립퍼선(clipper-크립퍼라는 말은 “to clip(속도)”와 “ to go at a good clip”(속도를 내어 가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이다.
이선박이 미국에서 개발이 되었다 하여 Yankee Clipper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 선박은 당시의 영국선에 비하여 속력을 올리기 위해 선체의 폭과 깊이는 그대로 두고 배의 길이를 크게 늘리고 높은 마스트를 세워 범장을 했다. (선미가 길고 오목한 형) 그러나 사실 범선의 속도 경쟁은 중국과 미국간의 수익성 있는 차 수송용도로서 건조되어졌다. 속도가 빠르면 그 해의 최초로 수확한 차를 싣고 미국으로 돌아오면 선주들은 많은 이익을 남겼다. 그래서 너도 나도 빠른 배를 선호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쾌속선이 많들어 졌다. 여러 가지 쾌속범선중에 가장 유명한범선이 바로 유명한 선박업자인 도날드 맥케이가 설계하고 건조한 “Flying Cloud”호이다. 이선박은 1851년에 만들어 졌는데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이 일어났기에 많은 물자의 수송을 빠르게 하기 위해 보다 빠른배를 선호 하여 만들어 졌는데 Flying Cloud”호는 배의 길이는 230 피트, 폭 41피트, 흘수 21피트로 이배가 유명한 이유는 뉴욕을 지나 케이프 혼을 거쳐서 샌프란시스코간(그당시에는 파나마 운하가 없어서 남미 대륙 가지 돌아 와야 했음)의 항해에서 기록적인 89일 21시간을 기록하였여 전에 다른 배가 수립한 기록보다 약 2주일이나 빨리 센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이후로부터 쾌속범선의 속도 경쟁의 불시를 지폈기 때문이다.
4.비운의 선박 바사호


바사호는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전함으로 처녀 항해중 침몰하여 항해를 한번도 하지못한 비운의 선박입니다. 17세기까지 스웨덴은 핀란드등을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인구는 겨우 150 만명 밖에 되지 않은 소국이였습니다. 바사호는 스웨덴이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했던 '북방의 사자왕’ 아돌프 구스타프 2세 바사왕이 스웨덴 왕실의 위엄을 알리며 발트해의 제해권을 차지하고 독일 황제와 경쟁을 벌이면서부터 함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1625년 스톡홀름에서 독일의 조선가 "Hendrick Hybertszoond"과 "Henrik Jakobson"에 의해 건조가 되었으나 바사왕 자신이 직접 설계를 변형해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배로서 총길이 69m, 최대폭 약 11.7m, 높이 52.2m, 배수량 약 1,210t, 적재 대포 64문, 탑승 가능인원이 450명이나 되고 당시 유럽에서 처음으로 함포를 상하 2열로 배치한 당대 최대의 중무장 전함이었다고 합니다. 배의 전면에는 구스타프 왕을 상징하는 사자상을 새겨 놓았으며 선체에는 황금으로 도금한 영웅과 병사의 조각상이 천여개나 새겨진 아주 호화로운 배였다고 합니다. 이 범선은 1628년 8월10일 100여명의 귀족들과 50명의 군인을 태우고 진수식을 하던 중 불과 3Km를 항해해서 스톡홀름 항구에 들어서는 순간 돌풍으로 좌현으로 경사가 져서 전복을 하여 그만 호수에 가라앉고 말았다고 합니다. 배가 침몰하자 배에 승선했던 100여명의 귀족들은 대부분 살아났으나 50명의 군인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으며 군인들의 피해가 크게 난 것은 왕의 명령에 의해 이 배를 타는 군인들은 도망을 갈 수 없도록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배의 침몰을 오히려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벡홀멘(Beckholmen)을 출항한 이 배는 건너편 섬에서 귀족들을 내려놓고 300명의 군인과 150명의 일꾼들을 태우고 전선으로 떠나게 되어 있었던 것인데 다행히 호수에 침몰함으로써 이들만이라도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배가 침몰한 정확한 이유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아마 무리한 설계 변경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전문가도 있다고 합니다. 원래 이 배의 처음 설계는 갑판에 32개의 대포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건조도중 한층의 갑판을 더 올리고 32개의 대포를 더 설치한 것이 배의 안정성을 깨뜨려 작은 파도에도 배가 한쪽으로 기울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 하는 사람도 있으며 ,또 다른 사람은 진수식을 할 때 대포들을 제대로 묶지도 않은 채 출항을 하였다가 배가 약간 기울자 한 쪽의 대포들이 반대편 쪽으로 쏠리면서 배가 침몰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던 원정에서 돌아온 바사왕이 호수에 침몰한 배의 돛대를 보고 - 이 배는 세 개의 돛을 달아 바람의 힘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통탄하며 "대포는 건져 올려 녹여서 쓰고 양쪽 돛대는 쳐서 없애 나로 하여금 이 배를 잊게 하라"라고 명함으로써 당시 62개의 대포는 건져 올려서 사용하고 배는 30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호수밑의 진흙에 묻혀 사람들이 기억속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그후 333년이 지난 1961년에 스웨덴의 안더스 프란젠이란 사람에 의해 바사호의 침몰 위치를 와 잔해를 발견되고 스웨덴국왕 구스타프 6세는 바사 호를 바다에서 인양해 영구 보존 작업을 시작한 그해 6월17일을 ‘바사 호의 날(Vasa Day)’로 선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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